학문 중심에서 학생 중심으로: 대학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한 이유
호주의 고등교육 시스템은 현재 중대한 전환의 기로에 서 있다. University World News에 게재된 Angel Calderon의 칼럼 “To thrive, universities will need to be student-centric”는 이 흐름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이 글은 대학이 생존하고 번영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지식 전달 기관이 아니라 학생들의 성공을 중심에 둔 전인적 교육 기관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한다. 본 칼럼에서는 Calderon의 분석을 토대로, 오늘날 고등교육의 과제와 ‘학생 중심’이라는 패러다임이 왜 불가피한지, 그리고 그 실현을 위한 구체적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대학 재정의 현실과 위기
호주의 연방정부는 2023-2024년 고등교육 분야에 약 161억 호주달러를 지출하였다. 이는 전년도 대비 9% 증가한 수치지만, 실질적인 대학 지원이 확대된 것은 아니다. CPI(소비자물가지수) 상승과 인구 증가에 따른 계산상의 증가일 뿐이며, 실제로는 지난 10여 년간 전체 정부 지출 중 고등교육의 비중은 오히려 감소했다. 2009-2010년에는 3.4%였던 이 비율이 최근에는 2.3%로 하락했다. 반면 국방 예산은 같은 기간 동안 5.9%에서 7.1%로 증가했다. 이는 단순한 예산 문제를 넘어 고등교육이 국가적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흐름은 호주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 각국에서 고등교육 재정은 긴축의 칼날을 피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주정부의 공립대학 지원금이 지속적으로 줄어들었으며, 유럽의 여러 국가는 재정 건전성을 이유로 고등교육 투자를 삭감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은 점차 기업형 운영방식과 수익 중심의 모델을 택하게 되었고, 이는 교육의 공공성을 훼손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국제학생 의존의 역설
재정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호주 대학들은 국제학생 유치에 주력해왔다. 2024년 호주는 교육 서비스 수출을 통해 약 515억 호주달러의 수익을 얻었고, 이는 전년 대비 9.8% 증가한 수치이다. 특히 고등교육 분야에서만 학생 등록금 수입이 168억 호주달러로 23.6%나 늘었다. 그러나 이러한 수치는 국제정세와 정부 정책 변화에 매우 민감하다. 최근 미국의 국제학생 감소는 이를 방증한다. 안정적인 재정 기반 확보를 위해서라도 대학은 단기적 수익 중심 전략을 넘어 근본적인 개혁이 요구된다.
국제학생 수익 의존도는 팬데믹 기간 동안 한계를 명확히 드러냈다. 국경이 봉쇄되면서 수많은 대학이 수입원을 잃고 구조조정에 들어갔으며, 일부 대학은 학과 통폐합과 인력 감축까지 단행했다. 이는 대학의 운영 방식이 얼마나 취약한 기반 위에 놓여 있었는지를 드러낸다. 따라서 이제는 단기 수익에 의존하기보다는, 국내 학생들의 교육 경험을 질적으로 향상시키고, 다양한 배경의 학생들을 포용하는 구조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학생 중심 비전이란 무엇인가
Calderon은 “학생 중심” 대학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학생의 학습 여정 전체에 걸쳐 지원 수준을 높이고, 졸업 이후 삶의 성공까지 포괄하는 교육 체계를 갖추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친절한 상담이나 취업 지원의 확대가 아니라, 학사과정 설계, 교수법, 평가 방식, 심지어 대학 행정 시스템 전체가 학생의 필요를 중심으로 재구성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오늘날 대학의 학생은 과거와 다르다. 다양한 연령, 인종, 배경을 가진 학습자가 존재하며, 그들의 필요 역시 획일적이지 않다. 이러한 다변화된 수요에 유연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개별 맞춤형 학습 경로와 유연한 수업 설계,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혼합형 학습 환경이 필수적이다. 예컨대, 미국의 애리조나주립대(ASU)는 데이터 기반 학생 지원 시스템을 도입해 이탈률을 낮추고 졸업률을 높이는 데 성공했다. 이는 기술과 데이터, 인간 중심 설계가 결합할 때 학생 중심 교육이 실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교수진이 핵심이다: 사람에 대한 투자
학생 중심 대학으로의 전환은 시스템의 변화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가장 핵심적인 자산은 바로 대학 구성원, 특히 교수진이다. Calderon은 대학이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교육의 질과 학생 참여도를 높이는 데 집중해야 하며, 이를 가능케 하는 사람에게 과감한 투자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실제로 호주 대학들의 최근 통계에 따르면, 2024년 기준 교수 및 전문인력의 수는 122,589명으로, 팬데믹 이전 최고치였던 2020년(116,859명)을 넘어섰다. 이는 대학들이 여전히 인적 자원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이다.
하지만 단순한 인력 수의 증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학생 중심 교육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교수의 역할이 지식 전달자를 넘어 ‘촉진자(facilitator)’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지속적인 교수법 연수, 감성지능 교육, 멘토링 역량 강화 등이 필요하다. 또한 교수와 학생 간의 신뢰 관계가 구축될 수 있도록 행정 업무 부담 경감, 교수의 자율성과 창의성 보장 등이 제도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대학 간 협력의 필요성
학생 중심 교육은 단일 대학의 노력만으로는 실현되기 어렵다. Calderon은 호주 내 43개 대학이 각기 다른 학생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를 하나의 통합된 국가 시스템으로 통합할 경우 운영 효율성이 크게 향상될 것이라 전망한다. 또한 인사 시스템 통합 등으로 대학 행정의 생산성을 높이고, 대학 간 자원 공유를 통해 재정적 지속 가능성을 도모할 수 있다. 이는 단순한 비용 절감이 아니라, 학생에게 보다 질 높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전략이기도 하다.
이러한 협력 모델은 한국에도 시사점을 준다. 지역 기반 대학연합체, 온라인 공동강좌 플랫폼(K-MOOC) 확대, 고등교육 클러스터의 조성이 그 예이다. 특히 지역 소멸 위기와 맞물려 지역 대학들이 연합체를 구성하여 공통의 커리큘럼을 개발하고, 교수자와 자원을 공유하는 방식은 학생에게 다양성과 선택권을 제공하며, 대학 운영에도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
대학은 왜 ‘서비스’ 산업인가?
많은 이들은 여전히 대학을 연구 중심의 학문 기관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Calderon은 대학 역시 ‘서비스 경제’의 일환으로 인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교육의 상품화라는 피상적인 의미가 아니라, 학생이 경험하는 모든 접점을 하나의 서비스 체계로 보고 개선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정부 또한 생산성 향상을 위한 3차 개혁 물결을 추진 중이며, 대학이 이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내적 혁신이 필수적이다.
교육을 서비스 산업으로 보는 관점은 단지 상업화가 아닌, 학생의 경험 전반을 품질 관리의 대상이자 개선의 대상으로 본다는 데 의미가 있다. 교실 안에서의 수업, 학사행정의 응답 속도, 온라인 포털의 접근성, 동아리와 학생자치 공간의 유무 등 모든 요소가 교육 품질을 구성한다. 세계 상위권 대학들이 캠퍼스 내 생활경험을 개선하는 데 막대한 투자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생존을 넘어 번영으로
오늘날 대학은 생존을 넘어 번영을 추구해야 하는 전환점에 있다. 단기적 재정 수지나 입학자 수만으로 성공을 측정하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얼마나 ‘학생 중심’적인 구조와 문화를 갖추고 있는지가 대학의 지속가능성과 사회적 신뢰를 좌우한다. Calderon의 글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학생 중심 교육 없이는 대학의 미래도 없다.
이러한 전환은 단순한 트렌드가 아니라 시대적 요청이다. 학령인구 감소, 산업구조의 급격한 변화, 학습자의 다변화라는 복합적 요인 속에서 대학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미래 세대에게 실질적인 역량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학생을 중심에 둔 교육 혁신이 절실하다. 그리고 그 혁신의 핵심은 ‘사람’, 곧 학생과 교직원, 그리고 지역사회와의 연결에서 출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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