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대학의 학점 인플레이션 실태와 ‘고객 중심’ 교육문화의 함정
“불만을 줄이기 위해 점수를 올린다” – 교육의 질 대신 학생 기분이 기준?
“학생은 고객이고, 고객이 항상 옳다면 그들이 만족할 점수를 줘야 한다.”
호주 대학에서 실제 교수들이 이렇게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2025년 7월, The Conversation에 실린 한 보고서는 대학 내 학점 인플레이션(grade inflation)의 심각성을 조명했다. 학생의 실제 역량보다 높은 성적을 주는 이 현상은, 더 이상 우연한 사례가 아니라 구조화된 교육문화의 일면임을 시사한다.
호주 남부 퀸즐랜드 대학교의 세 명의 연구자들은 전국 대학 교수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통해, ‘왜 성적이 실제보다 높아지는가’라는 질문에 접근했다. 응답자의 73%가 자신이 속한 대학에서 학점 인플레이션을 목격했다고 답했고, 그 이유로 학생 만족도 평가에 대한 압박을 가장 많이 지목했다. 평가에 불만을 품은 학생은 거침없이 낮은 강의평가 점수를 주고, 이는 곧 교수자의 승진이나 재계약, 업무 배정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학생은 수업의 평가자이자 소비자다” – 교육이 상품이 된 시대
문제의 핵심은 여기 있다. 학생이 ‘학습자’를 넘어 ‘소비자’로 인식되는 대학 문화. 대학의 재정 압박과 생존 전략 속에서 학생은 ‘머무르게 해야 할 고객’이 되었고, 고객의 이탈을 막기 위해 성적이 느슨해지고, 불만을 최소화하려는 경향이 생긴 것이다. 설문에 응한 교수들 중 일부는 “한두 점 차로 과락이 될 경우 점수를 올려주는 게 오히려 행정 부담을 줄이는 일”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들은 학생 불만이 클 경우, 수십 시간에 달하는 이의제기 응대와 내부 보고 업무에 시달리게 된다.
이는 단순한 수치상의 왜곡을 넘어, 대학의 존재 이유와 교수자의 역할 자체를 흔드는 구조다. 강의의 목적이 지식 전달이 아닌 ‘고객 만족’이 되어버리면, 그 과정에서 학문적 엄격함은 무너지고, 진짜 배움은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다.
교수자의 감정은 ‘무력감’과 ‘좌절감’… 교육자 아닌 서비스 직원?
흥미로운 점은, 이 연구가 기존의 학문적 논의와 달리 교수자의 ‘감정’을 전면에 다뤘다는 점이다.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학점 인플레이션에 대해 “좌절감”과 “무력감”을 느낀다고 답했고, “만족한다”는 응답은 7%에 불과했다. 학문적 기준을 지키고 싶어도, 조직 내부의 ‘불만 회피’ 시스템이 이를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교수들이 받는 강의평가는 많은 경우 익명으로 이루어지며, 비판을 넘어 모욕적 언사가 담기기도 한다. 2024년 호주에서 발표된 보고서에 따르면, 학생들이 남긴 강의평가 댓글 중에는 “멍청한 노파는 강의하지 말라”는 식의 인신공격성 발언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처럼 교수자의 자존감이 심각하게 훼손되는 상황에서, “어차피 평가에 영향 줄 거면 점수라도 잘 줘야겠다”는 소극적 순응이 확산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항상 문제일까?” – 학점 인플레이션을 정당화하는 논리들
이번 설문조사에서는 학점 인플레이션이 문제라고 단정하지 않는 시각도 일부 존재했다. 응답자 중 일부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점수 상향 조정은 불가피하거나 정당화 가능하다고 보았다.
- 고등교육의 대중화에 따른 변화
한 응답자는 “대학이 과거처럼 엘리트만 다니는 곳이 아니라면, 성적 분포가 달라지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주장했다. 학점 상승이 곧 교육 질 저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 소폭 상향은 실질적 영향이 없다
“1~5점의 차이는 전문적 역량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었다. 오히려 ‘낙제’라는 이분법적 판정이 더 큰 심리적 타격을 준다는 주장이다. - 학생들의 어려운 상황에 대한 공감
정신건강 문제, 가족 부양, 병행 아르바이트 등 복합적 어려움 속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늘고 있다는 현실을 고려할 때, ‘엄격한 잣대만이 능사는 아니다’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러한 목소리는 교육이 결과만이 아니라 과정과 배려도 담보해야 한다는 철학과도 연결된다. 하지만 문제는, 이 모든 판단이 개별 교수의 주관에 좌우되고 있다는 점이다. 기준 없는 동정심이 반복되면, 결국 성적의 의미 자체가 희석될 수밖에 없다.
한국 대학은 지금 어디쯤 왔는가?
이러한 논의는 단지 호주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한국 대학 역시 학점 인플레이션과 ‘고객 중심 교육문화’의 경계에 서 있다. “평가 잘 받아야 살아남는다” 많은 대학들이 여전히 ‘강의평가 점수’를 교수 인사에 반영하고 있다. 그 결과, 일부 교원은 “수업 질보다 학생 기분을 관리하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고 토로한다. “성적 깐깐하게 주면 강의평가 낮게 나온다”는 말은 이제 학내 상식처럼 회자된다. 일부 대학에서는 A와 B 학점이 전체의 80%를 넘는 현상도 발견된다. “평균 학점이 4.0”이라는 말을 농담처럼 하는 대학도 있다. 성적 기준이 느슨해지면, 결국 취업 시장에서 학위의 신뢰도가 낮아질 수밖에 없다. 수도권 이외 대학들, 특히 지방 사립대학의 경우, “학생 만족도 = 대학 생존율”이 되면서 교수들은 실질적으로 교육자이기보다 고객 관리인 역할을 하게 된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진짜 위기는 “질문의 부재”일지도 모른다
학점 인플레이션을 단순히 “성적 퍼주기”라며 비난하기는 쉽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대학이 무엇을 위한 공간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희미해지고 있다는 점일지도 모른다. 대학은 지식을 배우고 성장하는 곳인가, 아니면 졸업장을 제공하는 서비스 공간인가? 교수는 연구와 교육을 통한 학문 후속세대를 양성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학생 만족을 관리하는 사람인가? 성적은 역량을 평가하는 기준인가, 불만을 줄이기 위한 회피 전략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사회 전체의 합의가 없을 때, 대학은 계속해서 양면적인 얼굴을 가질 수밖에 없다. 외형은 학문 기관이지만, 운영은 수익기관처럼 굴러가는 상황 속에서 교수와 학생 모두 진짜 교육의 의미를 상실할 위험에 처해 있다.
교육이 ‘부드러워지는’ 시대, 학문은 어디에 서 있어야 하나
호주의 사례는 단순히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학생의 불만이 곧 조직의 리스크’가 되는 지금의 구조 속에서, 어느 사회의 대학도 학점 인플레이션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이렇다. “학생에게 만족을 주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 될 수 있는가?” “대학이 학문의 최전선이 아니라, 소비자 만족의 현장이 되는 순간 우리는 무엇을 잃게 되는가?”
이 질문에 대한 진지한 논의 없이, 어느 대학도 ‘교육의 질’을 이야기할 자격은 없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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