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성형 AI 시대, 우리는 누구의 창작을 소비하고 있는가
지브리 스타일의 정체성, 그리고 그 비가시적 경계선
스튜디오 지브리는 단순한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관이며, 인간과 자연, 상상과 현실, 감성과 서사의 균형이 어우러진 종합예술의 집약체다. 많은 이들이 ‘지브리 스타일’을 말하지만, 그것은 단지 연한 색감과 부드러운 선묘, 판타지적 배경이나 일본적 정서가 결합된 시각적 요소만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지브리 스타일의 핵심은 느림과 사색, 그리고 ‘비어 있음’에서 오는 감정의 공간이다. “나우시카”의 황폐한 세계, “이웃집 토토로”의 목가적 일상,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의 성장 서사는 모두 시각 이상의 무언가를 전달한다. 그것은 창작자의 철학이며, 수십 년간 축적된 정서적 문법이다. 이 스타일은 어느 한 작가의 천재성만이 아니라, 팀 단위의 고유한 협업 방식과 시간에 의해 형성된 집합적 감수성이다.
과거에는 ‘그릴 수 있지만 그리지 않았다’
흥미로운 점은, 지브리 스타일의 모방이 생성형 AI 등장 이전에도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숙련된 화가라면 지브리 스타일을 흉내 낼 수 있었고, 팬아트 문화 속에서도 그 유사한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실제 제작에 이르지 못했고, 그 시도는 제한적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수고에 비해 얻을 수 있는 가치가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브리 스타일을 그려봤자 그것은 ‘지브리가 아닌 무언가’였고, 창작자 스스로도 그것이 진정한 창작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즉, 창작자들 사이에는 일종의 윤리적 자율성이 작동했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감히 하지 않았던 영역. 창작자 간에 존중되어 온 ‘무형의 선’이 존재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지브리 스타일은 법적으로 보호받기보다는, 암묵적 예우와 창작적 경외감에 의해 유지되어 왔다. 지브리 스튜디오는 그 스타일을 법조문으로 가둘 필요조차 없을 만큼 확고한 창작적 위상을 지녔다.

생성형 AI의 등장이 만든 결정적 균열
하지만 생성형 AI는 이러한 창작 윤리의 풍경을 단숨에 전복시켰다. Midjourney, DALL·E, Stable Diffusion과 같은 도구들은 단 몇 초 만에 ‘Ghibli-style background’, ‘Spirited Away-like character’라는 텍스트 입력만으로 마치 지브리의 작업실에서 막 나온 듯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그저 기술적 진보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 창작자들이 수십 년간 쌓아올린 스타일의 성벽에 누군가가 문을 열어젖힌 일이다. 그 문을 통해 수많은 소비자들이 아무런 수고 없이 안으로 들어가, 감탄과 열광 속에 ‘지브리풍의 재현’을 소비하고 있다. 문제는, 이제 이들이 그 문이 누구에 의해, 어떤 맥락 속에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질문조차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작권의 경계, 스타일은 보호받을 수 있는가?
이 지점에서 저작권 문제는 복잡해진다. 기존 저작권법은 구체적 ‘표현(expression)’을 보호하지만, ‘스타일(style)’은 보호 대상이 아니다. 이는 의도된 공백이라기보다는, 과거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스타일의 모방이 가능하더라도,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시간과 기술적 장벽이 존재했기에, 자연스럽게 일정한 보호가 가능했다.
하지만 AI는 이 장벽을 허물었다. AI는 과거 데이터를 학습하면서, 특정 작가나 스튜디오의 스타일적 문법을 파악하고 재조합할 수 있다. 특히 ‘지브리 스타일’처럼 수십 년간 축적된 대중 이미지와 팬 콘텐츠가 풍부한 경우, AI가 이를 모방하는 것은 거의 자동적이다. 문제는 여기서 AI가 학습한 데이터에 대한 저작권 처리도 불분명하고, 생성된 결과물에 대한 창작성 판단 기준도 흐릿하다는 점이다.
법은 따라가지 못하고, 기술은 앞서가며, 창작자들은 침묵 속에 손해를 입는다.
창작의 탈맥락화, 그리고 소비자의 망각
AI가 만들어내는 지브리풍 이미지는 더 이상 배경화면이나 팬아트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제는 AI를 활용해 지브리 스타일의 애니메이션, 지브리 스타일의 동화책, 지브리 스타일의 게임까지도 만들어지고 있다. 이쯤 되면, 우리는 묻게 된다: “과연 이 작품은 누구의 것인가?”
더 본질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창작자의 맥락 없이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브리의 장면 하나에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철학, 팀 단위의 창작 논의, 수개월의 리서치와 디테일 조정이 담겨 있다. 하지만 AI는 이러한 맥락 없이 결과물만을 추출한다. 그리고 소비자는 그 맥락의 빈자리를 느끼지 못한 채 감탄하고 공유하며 소비한다.
이것은 단지 기술적 복제의 문제가 아니다. 창작을 구성하던 ‘의미의 구조’ 자체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누구의 문제도 아닌, 모두의 문제
지브리 스튜디오의 당혹감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자신들이 구축한 미적 체계가 너무도 손쉽게 타인에 의해 재가공되고, 때로는 상업적으로 활용되기까지 하는 현실 속에서, 창작자는 존중받지 않는다. 더욱이 법과 제도는 이들을 실질적으로 보호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지브리에 국한되지 않는다. 타겟은 바뀔 뿐, 다음은 누가 될지 모른다. 서정적 회화 작가, 특정 색감의 일러스트레이터, 세밀한 동양풍 선화를 그리는 디자이너… 모두가 ‘AI 프롬프트’에 의해서 ‘스타일’이라는 이름 아래 분해되고 재조합될 수 있다.
그리고 이 과정의 가속화는, 점점 더 많은 창작자들을 창작의 외곽으로 몰아낼 것이다. AI는 인간의 능력을 보완하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창작을 대체하는 도구로 작동할 때 그 파괴력은 상상 이상이다.

우리가 지금 소비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제 우리는 새로운 자문이 필요하다. AI가 만든 이미지가 아름답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누구의 피와 땀에서 비롯된 것인가? 지브리 스타일의 AI 이미지 하나를 보며 감탄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이미지가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 어떤 창작을 압축하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누구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더 많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금 소비하고 있는 콘텐츠가 진정한 ‘창작’인지, 아니면 ‘복제된 기호의 잔해’인지 구별할 수 있는 감수성이다.
기술의 발전은 되돌릴 수 없다. 생성형 AI는 앞으로도 더 정교하게, 더 빠르게, 더 다양하게 인간의 창작물을 재현할 것이다. 하지만 이 흐름 속에서 우리는 창작의 본질을 지켜내야 한다. 창작은 단순히 예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를 해석하고, 삶을 감각하며, 감정을 전달하는 인간적 행위이다. 그 과정은 때로는 비효율적이고, 고통스럽고, 느리다. 하지만 그 느림 속에 인간의 존엄과 깊이가 존재한다.
지브리 스타일이란 단지 그림체가 아니다. 그것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묵직한 질문이며, 수십 년간 쌓아온 윤리적 성찰의 집합체다. 우리는 AI가 그것을 ‘스타일’이라는 껍질로만 소비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성벽은 무너졌지만, 경계는 다시 그어야 한다
AI는 성벽에 문을 만들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환호하며 그 문을 넘는다. 그러나 창작자들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벽을 다시 쌓을 수는 없더라도, 경계는 다시 설정되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단지 법의 개정이나 기술의 제한이 아니다. 그것은 창작에 대한 새로운 윤리, 새로운 존중, 그리고 소비자의 새로운 책임이다. 우리는 더 이상 소비자에 머무르지 말고, 창작의 맥락을 이해하고 지지하는 참여자가 되어야 한다.
AI 시대, 진짜 예술은 창작자의 손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손의 무게를 아는 이들의 존중 속에서만 유지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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