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를 가르고 혐오를 동원하는 정치가 아닌, 민주주의의 누대를 잇는 존중의 정치로 나아가야 할 때
시대의 무게를 깎아내리는 정치 언어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이재명과 김문수라는 이름은 서로 다른 길을 걸었으나, 공히 시대의 무게를 짊어졌던 인물로 기록된다.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독재의 그늘을 딛고 민주주의의 진전을 위해 싸웠다. 가난한 공장 노동자였던 소년 이재명은 주경야독 끝에 사법시험에 합격해 인권 변호사의 길로 들어섰고, 이후 성남시장과 경기도지사를 거치며 지방자치와 복지 행정의 혁신을 실험했다. 그의 삶에는 계급의 벽을 뚫는 분투와 공공의 선에 대한 확신이 새겨져 있다.
한편 김문수는 1980년대 노동운동의 중심에 있었고,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여러 차례 투옥되며 반독재 투쟁의 선두에 섰다. 이후 한나라당 소속으로 경기도지사를 지내면서 보수 진영 내에서 개혁적 리더십을 보여준 사례로 평가받는다. 물론 현재 그가 보여주고 있는 정치 행보에는 동의하지 않는 이들이 많다. 필자 역시 그의 최근 정치적 입장에는 분명히 선을 긋는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과거에 민주화를 위해 누구보다 진심으로, 치열하게 살았던 삶의 진정성을 부정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정치적 평가는 시대마다 변할 수 있으나, 역사의 진실은 지워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는 최근 대선 인터뷰에서 이 두 인물의 삶을 자신의 홍보 수단으로 끌어왔다. “아이가 과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 같은 삶을 살길 바라느냐,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 같은 삶을 살길 바라느냐, 아니면 아이에게 롤 모델로 이준석을 제시하겠느냐. 고민해 볼만한 주제다”“는 그의 발언은 단순한 비교를 넘어 두 인물의 삶을 사실상 열등한 선택지로 상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정치가 삶의 서열을 매기는가?
정치는 누가 더 ‘낫다’는 서열을 매기는 방식이 아니다. 이재명과 김문수의 삶에는 시대를 이겨내고 공동체를 변화시킨 진심과 고통이 담겨 있다. 이들이 걸어온 길은 오롯이 개인의 명예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정의를 외치다 감옥에 갇히고,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대변하느라 조롱과 위협에 직면했던 이들의 생은 누군가의 정치적 비교 자료로 활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시대가 있었기에, 오늘날 이준석이 하버드 유학을 가고 정치 무대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노무현 정부의 국비 유학생 제도를 통해 해외에서 교육받았고, 박근혜 비대위에 발탁되어 입문한 정치인이며, 무엇보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성과 위에서 안전하고도 편리하게 살아온 세대의 대표이기도 하다. 그가 누렸던 안정과 기회는 누군가의 희생과 사회적 진통 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을 ‘아이들에게 권할 수 있는 삶’으로 설정하고, 과거의 정치인을 낮춰 세대적 자부심을 자극하는 발언을 반복한다. 이는 명백한 도덕적 우월감이자, 정치적 마케팅을 위한 도식적 ‘삶의 서열화’에 불과하다.
표 계산에 갇힌 정치인의 한계
이준석의 정치 커뮤니케이션 전략은 뚜렷하다. 그는 대결구도를 만들고, 대중의 감정을 자극하며, 간결한 키워드로 자신의 위치를 부각한다. 이는 20~30대 젊은 층에게는 일견 신선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가 활용하는 도구는 ‘비교’가 아니라 ‘폄하’이며, 그가 세운 기준은 ‘합의’가 아니라 ‘단절’이다. 그는 정치적 설득보다는 혐오와 우열을 통해 분열을 조장하는 방식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남성과 여성, 진보와 보수,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를 차례로 갈라놓은 그의 메시지는 정치를 ‘우리의 문제’를 푸는 장이 아닌 ‘나의 자리를 확보하기 위한 전장’으로 전락시킨다. 이준석은 스스로를 시대의 개혁자로 포장하지만, 정작 그가 취하고 있는 언어는 분열과 대결을 먹이로 삼는 구태의 정치를 재생산하는 도구일 뿐이다. 그의 정치에는 불편한 진실 앞에서 책임지겠다는 의지보다, 빠른 판단과 자기 합리화를 통한 면피가 앞선다. 이것은 단지 미숙함의 문제가 아니다. 정치철학의 부재다.
그의 혐오를 조장하는 언행은 이념을 가진 신념 정치가 아니라, 지지율을 올리기 위한 계산 정치다. 그는 자신을 포장하기 위해 과거의 누군가를 지우고, 미래의 유권자를 오도한다. 그런 정치는 오래가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정치는 대한민국을 더 나은 곳으로 이끌 수 없다.

기억을 지우는 자, 민주주의를 가볍게 만든다
민주주의는 시간과 기억의 총합이다. 과거를 존중하지 않는 정치는 미래를 설계할 자격이 없다. 이준석이 김문수와 이재명의 삶을 하나의 구시대적 실패로, 또는 ‘아이가 닮아서는 안 될’ 삶으로 규정하는 순간, 그는 자신이 서 있는 자리의 근거를 허문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바로 그들과 같은 수많은 이름 없는 이들이 감내한 절망과 저항 속에서 형성되어왔다.
진정한 리더라면 그들의 삶에 깃든 의지를 이해하고, 그 무게를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리더십은 젊음이나 학력, 외국 유학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치는 말과 논리 이전에, 삶에 대한 공감과 기억에 대한 존중에서 출발해야 한다.
정치는 누군가를 잊는 기술이 아니다
정치란 공통의 기억을 기반으로 더 나은 사회를 설계하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의 삶을 함부로 줄 세우고, 비교하고, 배제하는 것은 정치가 아니다. 그것은 캠페인일 수는 있으되, 결코 리더십은 아니다. 이준석의 말은 단지 실언이 아니다. 그것은 정치가 사람을 어떻게 대상화하고, 어떻게 계량하며, 어떻게 지워나가는지를 보여주는 일례다.
지금 대한민국은 다시 민주주의의 방향을 묻고 있다. 각 세대는 각자의 방식으로 그 시대를 감내했고, 그 시대를 살아냈다. 이준석이 자신의 시대적 좌표를 인식하지 못한 채 과거를 부정하고 현재의 자만에 빠진다면, 그는 결코 미래의 리더가 될 수 없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토론회나 유세차가 아니라, 정치가 품어야 할 최소한의 경의다.
우리는 더 이상, 정치를 하겠다는 사람들이 자신보다 먼저 시대를 열었던 이들의 삶을 폄훼하며 ‘내가 더 낫다’는 잣대로 공동체를 갈라놓는 모습을 보아서는 안 된다. 진짜 정치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주는 다리다. 그 다리를 허물고 무대에 선 자는, 지도자가 아니라 연설자에 불과하다.
정치란 누군가의 인생을 서열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인생들이 모여 하나의 사회가 되었음을 잊지 않는 것이다. 그런 정치를 할 수 없다면, 그 누구든 정치에서 떠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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