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문제인지 모르는 이준석은 자격이 없다.
제21대 대통령선거 후보자 TV토론회는 온 국민이 지켜보는 공적 장이다. 그러나 지난 5월 27일, 그 자리는 한순간에 여성의 신체를 조롱과 모욕의 대상으로 삼는 폭력적 언어의 무대가 되었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선 후보가 성폭력을 연상하는 표현을 인용하며 질문을 이어갔기 때문이다. 이는 단지 혐오 표현이라는 수준을 넘어, 여성의 몸을 대상화하고 도구화하는 폭력적 상상력을 공중파와 온라인을 통해 전국민에게 실시간 전파한 사건이다.
이 발언은 단순히 ‘불쾌함을 유발한 실수’가 아니다. 이는 명백한 성폭력적 표현이며, 수많은 여성과 시민단체가 이 발언을 “계획적 혐오”, “인권침해 행위”로 규정하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했다. MBC는 해당 장면을 묵음 처리하며 그 부적절함을 인정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이준석 후보는 “어디에 혐오가 있느냐”며 되묻고, 자신은 단지 다른 사람의 표현을 인용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준석 후보는 자신의 발언이 이재명 후보 장남의 인터넷 게시글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는 사실 확인이 끝난 내용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 표현을 “가치중립적 단어로 바꿨다”고까지 말했다. 하지만 맥락은 다르다. 특정 커뮤니티에 게시된 저급한 음담패설을 대국민 방송 토론장에서 꺼내는 것은 단순한 인용이 아니다. 그것은 그 표현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공적인 언어로 ‘승격’시키는 행위다. 설령 순화된 표현이었다고 하더라도, 본질은 그대로다. 여성의 몸을 특정 방식으로 조롱하고 대상화하는 표현은 어떤 형태로든 여성혐오이다.
왜 여성혐오인가 – 표현의 구조와 맥락
이준석 후보가 토론회에서 인용한 표현은 단순히 거친 언어를 넘어 명백한 여성혐오적 상상력을 담고 있는 폭력적 발언이다. 그 표현은 두 가지 점에서 여성혐오로 규정된다.
첫째, 여성의 신체를 대상화하고 도구화했다는 점이다. 해당 표현은 여성의 신체를 성적 도구이자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여기서 여성은 더 이상 인격체가 아닌, 조작 가능한 ‘물체’로 표현된다. 이는 전형적인 여성혐오의 언어적 구조이다. 이런 표현은 여성에게 단지 불쾌감을 주는 것을 넘어, 여성이 언제든 유희적 조롱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회적 메시지를 강화한다. 더 나아가 성폭력에 대한 상상과 그것의 모사적 표현을 공공언어로 수용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것이 주는 위협감은 단지 표현 수위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폭력의 정상화이며, 여성의 신체에 대한 존엄의 파괴다.
둘째, 성폭력적 상상이 유희로 소비되는 인터넷 문화의 일부를 공적 장으로 끌어들였다는 점이다. 이 발언은 원래 특정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유통된 음담패설 중 하나였다. 문제는 그것이 이미 성차별적, 성폭력적 맥락 안에서 소비되던 언어였다는 사실이다. 이를 “순화된 표현”이라며 토론회에서 재현하는 순간, 그 발언은 단순한 인용이 아니라 그 문화를 공적으로 인정하고 사회적 발언권으로 재포장하는 행위가 된다. 이 발언을 접한 사람들—특히 여성—은 단지 한 후보자의 “검증”을 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체가 다시 한 번 공적인 자리에서 모욕당하고 있다는 감각을 체험하게 된다.
셋째, 여성의 성을 통제하고 위협하는 방식의 표현은 곧 권력 행위다. 이준석의 표현은 단지 혐오나 조롱을 넘어서서 신체적 위해를 가하는 구체적 상상이다. 이는 여성에 대한 위협이자, 남성 중심 권력구조 속에서 여성을 통제할 수 있다는 인식을 반영한다. 여성을 위협하고 공포에 빠뜨리는 성적 발언은 그 자체로 여성혐오이며, 이를 반복하거나 공적으로 인용하는 것은 구조적 차별의 일부가 된다.

이준석 후보가 “이게 어디가 혐오냐”고 되묻는 것은, 바로 이런 차별 언어의 구조와 맥락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혐오는 단지 ‘의도’로 결정되지 않는다. 특정 집단이 꾸준히 차별당해온 역사와, 그 표현이 갖는 함의 속에서 판단되어야 한다. 여성의 몸을 이런 방식으로 이야기하고도 “검증”이라고 포장한다면, 그는 정치인 이전에 공동체의 언어적 윤리를 파괴하는 인물이다.
정치인의 자격, 대통령의 자격
이준석 후보는 자신에 대한 비판을 ‘집단 린치’라고 표현했다. 시민단체와 언론의 비판, 시위와 항의 모두를 일종의 정치적 탄압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본질을 왜곡하고 있다. 비판받는 이유는 그가 특정 후보의 가족을 검증했기 때문이 아니라, 검증을 빌미로 여성에 대한 혐오를 공론의 장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표현의 자유를 언급하며 감정적으로 대응할 일이 아니라, 스스로의 언어가 지닌 폭력성과 권력성을 되돌아봐야 할 문제다.
대통령 후보는 단지 정책을 내세우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공동체가 나아갈 윤리적 기준과 사회적 문법을 제시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공적 자리에서 여성의 몸을 조롱하는 표현을 내뱉고도 “무슨 혐오냐”고 반문한다면, 그가 만약 대통령이 되었을 때 어떤 종류의 공적 언어가 제도화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두렵다.
극단적 지지자들의 환호에 갇힌 리더
이준석 후보는 일부 지지자들의 열광 속에서 스스로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받고 있다고 느낄지 모른다. 그러나 정치인은 인기보다 더 큰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다. 그가 말하는 “가족 검증”의 필요성을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여성의 몸을 모욕하는 방식으로 질문을 던지는 건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문제는 단지 표현 수위가 아니다. 문제는 그 표현이 여성에 대한 멸시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표현을 ‘검증’이라는 이름 아래 사용해도 괜찮다고 믿는 세계관이다.
이준석 후보는 지금, 지지자들의 박수 속에서 사회적 윤리의 한계를 시험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박수소리보다 크고 분명한 목소리로 말해야 한다. 혐오는 인용이든 비판이든 어떤 이유로도 공론장에서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 혐오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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