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와 졸업생이 경쟁하는 시대
2025년 여름, 영국 대학 졸업식이 한창인 가운데, 축하의 열기 이면에는 묵직한 불안감이 드리워져 있다. 대학을 졸업한 청년들이 마주한 노동시장은 팬데믹 이후 가장 혹독한 취업 환경으로 바뀌었고, 그 중심에는 인공지능(AI)의 등장이 있다. 일자리는 줄고, 남은 자리마저도 이제는 인간이 아닌 AI가 먼저 차지하고 있다는 현실이 통계로 확인되고 있다.
취업 플랫폼 ‘인디드(Indeed)’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5년 현재 영국 내 최근 졸업생을 위한 구인 공고는 전년 대비 33% 감소했으며, 이는 지난 7년간 가장 낮은 수치다. 특히 초기 진입용 전문직(entry-level professional jobs) 분야의 감소가 두드러진다. 법률, 금융, 컨설팅, 데이터 분석 등 전통적으로 신입사원이 커리어를 시작하던 직종들에서 AI가 그 자리를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는 분석이 이어지고 있다.
사람이 하던 일을 AI가 대신한다
기업들은 이제 더 이상 초보자의 성장 가능성을 기대하며 신입을 뽑지 않는다. 대신, 이미 일정 수준의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AI 기술에 의존하고 있다. 단적인 사례가 IBM이다. 이 회사는 현재 인사(HR) 부문에서 전체 업무의 94%를 AI를 통해 처리하고 있다. 성과 평가, 교육 계획, 이직 예측까지도 알고리즘이 대신 판단하고, 이 과정에서 신입 인력이 맡던 기초 업무는 자취를 감췄다.
이런 변화는 단순히 반복 업무의 자동화에 그치지 않는다. 최근 많은 기업들은 신입 채용의 첫 단계에서부터 AI를 활용하고 있다. 지원자의 이력서를 필터링하고, 적합도를 계산해 인간 면접관이 검토할 후보를 사전에 좁히는 절차가 점차 일반화되고 있다. 이로 인해 많은 졸업생들이 ‘사람의 눈에 닿지도 못한 채’ 탈락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AI가 수행하는 업무가 늘어날수록, 졸업생이 배워야 할 일은 줄어든다. 더 정확히 말하면, ‘배워볼 기회조차 없어지는’ 것이다. 기존에는 회사에 입사한 뒤 실제 과업을 수행하며 업무 감각을 익힐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첫 기회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
진입 문턱이 사라진 노동시장
노동시장이라는 건물에 문은 열려 있어도, 계단이 사라져 있다면 누구도 올라설 수 없다. 지금의 졸업생들이 처한 현실이 그렇다. 단지 일자리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신입이 시작할 수 있는 ‘입구’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구조가 확산되고 있다. 이는 단기적인 경기 침체나 고용 조정의 문제가 아니다. AI가 만들어낸 노동 재편이 ‘출발선’을 없애고 있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교육 불평등, 세대 간 단절, 사회적 좌절감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미 팬데믹 기간 동안 교육 경험이 왜곡된 세대가, 졸업 후에도 정상적인 경력 시작을 하지 못하게 된다면, 이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생산성과 신뢰 체계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가 된다. 가디언 사설은 “정부와 기업이 젊은 인재에게 출발 기회를 보장하지 않는다면, 세대 간 불신은 더 깊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단지 영국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 한국에서도 감지되는 변화
영국의 졸업생 취업 위기는 먼 나라 이야기로 치부하기 어렵다. 한국에서도 이미 비슷한 징후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대기업과 주요 공공기관은 수년 전부터 ‘경력직 위주 채용’으로 전환했으며, 이른바 ‘공채 폐지’ 흐름은 더 이상 새로운 뉴스가 아니다. 직무 중심 수시 채용이 확대되면서 신입 채용은 규모와 빈도가 모두 줄어들었고, 그 여파는 고스란히 졸업 예정자들에게 돌아가고 있다.
여기에 더해, AI 기반 채용 시스템도 점차 도입되고 있다. 국내 일부 기업은 서류 평가 단계에서부터 AI 알고리즘을 활용해 지원자의 문장 표현, 키워드 사용, 문서의 구성 논리 등을 분석하고 있다. 이는 전통적인 서류 심사보다 훨씬 더 많은 지원자를 빠르게 걸러낼 수 있지만, 동시에 평가 기준이 불투명해지고, 학습 기회가 없는 ‘탈락자’가 양산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낳고 있다.
일부 기업은 AI 면접 시스템까지 도입해 지원자의 표정, 목소리 톤, 대화 반응 속도 등을 자동 분석해 적합도를 판단한다. 이 과정에서 사람과의 실제 대화 없이 ‘기계 앞에서의 퍼포먼스’가 취업 가능성을 좌우하게 되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 결국, 사람이 아닌 알고리즘에게 낙제점을 받은 신입 구직자들은 사회 진입의 첫 문턱조차 밟지 못하고 돌아서야 하는 현실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졸업장은 있지만, 대학은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가
이러한 급변하는 노동 환경 속에서, 대학은 과연 무엇을 준비하고 있을까. 많은 고등교육 기관은 여전히 ‘학문 중심 교육’이라는 전통적 틀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노동시장에서 요구하는 것은 단지 전공 지식이나 학위가 아니라, 즉시 투입 가능한 실무 역량과 문제 해결 능력이다. 지금과 같은 구조가 계속된다면, 대학은 졸업장을 제공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졸업 이후 삶의 실제 문을 열어주는 역할은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일부 대학은 인공지능 관련 커리큘럼을 확대하고, 데이터 분석이나 코딩 과목을 필수화하는 등 AI 시대에 대응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경우, 교육은 ‘기술 습득’에 머무르고 있고, 이를 실제 업무에 적용하는 훈련은 부족하다. AI를 도구로 활용할 수 있는 능력과, 기계와 협업하며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판단을 내리는 힘은 별개의 문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신입이 진입할 수 있는 구조 자체를 다시 설계하는 것이다. 아무리 AI 기술을 익힌다 해도, 그 역량을 발휘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결국 모든 배움은 무력해진다. 기업이 ‘즉시 성과’를 낼 수 있는 인재만을 선호하고, 대학이 ‘성적’과 ‘졸업장’만을 내어주는 체제가 지속된다면, 그 사이에서 졸업생은 점점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신입 없는 사회”는 모두에게 손해다
AI의 발전이 일자리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일을 만들어낼 것이라는 낙관론도 있다. 실제로 일부 연구소나 정책 기관은 AI 도입이 기존 직무를 재편하면서 ‘창의적 역할’과 ‘융합 직무’에 새로운 기회를 열어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전제조건이 있다. 젊은 인재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출발선이 존재해야 하고, 그들이 경험을 통해 역량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 구조가 구축되어야 한다.
단기적 성과에만 몰두한 채 신입 채용을 줄이고, AI가 모든 초기 직무를 대신하게 만든다면, 결국 그 사회는 중장기적으로 성장 가능성을 스스로 제한하는 것과 다름없다. 숙련된 전문가도 처음엔 신입이었고, 리더도 누군가의 멘토 아래에서 배워야 성장할 수 있었다. 신입이 없는 구조는, 결국 전문가도 사라지는 사회로 이어진다.

AI 시대, ‘신입’이 살아남기 위한 조건
이제는 단순히 취업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스펙 쌓기’만으로는 부족한 시대가 되었다. 졸업장과 자격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제 환경에서 부딪혀보고 문제를 풀어본 경험이다. 인공지능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판단하지만, 인간은 맥락을 이해하고 협업을 조율하며,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다. 신입 구직자에게 필요한 것은, AI가 대신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하고 배우는 힘, 즉 ‘경험 기반의 성장 가능성’이다.
이를 위해 대학은 교육과정 안에 더 많은 실무 기반 학습을 통합해야 하며, 기업은 신입에게 시간과 자원을 들여 훈련시키는 문화적 여유를 회복해야 한다. 정부는 노동시장에 진입하려는 청년들을 위한 정책적 출발선을 보장하고, AI가 대체한 만큼의 기회를 되살리는 방향으로 제도를 설계해야 한다. 모든 주체가 함께 ‘신입이 설 수 있는 계단’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
“경험 없는 세대”를 만들지 않기 위해
가디언 사설은 AI의 확산이 젊은 세대의 기회를 앗아간다면, 사회 전체가 신뢰를 잃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지금의 졸업생들은 팬데믹이라는 교육 공백을 겪었고, 높은 학자금 부채에 시달리고 있으며, 이제는 AI로 인한 채용 축소라는 새로운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이들을 단지 ‘적응하라’고 다그치는 것은 무책임하다. 이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기회를 설계하는 것, 그것이 오늘날 사회의 책임이다.
AI는 분명히 세상을 바꾸고 있다. 그러나 이 기술의 발전이 한 세대의 시작을 가로막는다면, 그것은 혁신이 아니라 퇴보다. 신입이 설 수 있는 자리를 회복하는 것, 그것은 단지 청년을 위한 일이 아니다. 모든 세대가 함께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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