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 중심의 AI 생태계 구축을 위한 정책 제안… 분산형 인프라, 연구자 주도 거버넌스, 오픈사이언스 가치 수호 강조
AI, 연구의 핵심으로 부상… 유럽연합의 전략 구상
2025년 6월, 유럽대학협회(European University Association, EUA)는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의 ‘과학 분야 인공지능(AI) 전략’ 수립을 위한 공개 정책 제안서에 응답하며, AI 기술이 학문과 연구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과 향후 방향에 대한 입장을 담은 문서를 발표했다. 이 제안서는 인프라 구축, 재정 구조, 거버넌스, 윤리와 유럽적 가치, 데이터 정책 등 다양한 측면에서 AI 활용의 구조적 기반을 진단하고, 대학과 학문 공동체의 중심적 역할을 재확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유럽연합은 이미 AI 팩토리(AI factories), Cloud and AI Development Act, InvestAI 같은 대형 프로젝트를 통해 AI 인프라를 조성하고 있으나, EUA는 이러한 정책이 성공하려면 학문계의 전문성과 공공성을 중심에 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보고서는 ‘AI는 누구의 것을 위한 기술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대학이 단순한 수요자가 아닌 전략의 주체가 되어야 함을 천명한다.
AI 팩토리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분산형 인프라의 필요성
유럽연합은 현재 AI 팩토리, 이른바 ‘AI 기가팩토리’를 통해 대규모 인프라를 집중적으로 구축하고 있다. 그러나 유럽대학협회(EUA)는 이러한 일원화된 접근이 오히려 학문 생태계 내 다양성과 형평성을 해칠 수 있다고 경고한다. 특히 다양한 학문 분야는 서로 다른 데이터 규모, 알고리즘 설계, 계산 자원을 필요로 하며, 단일한 인프라 구조로는 이러한 수요를 충족시키기 어렵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따라서 AI 팩토리 간에 연구 중심의 역할을 분산하고, 각국 및 각 분야의 연구자들이 균등하게 접근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단순한 자원 배분 문제가 아니라, 유럽 전역의 혁신 생태계를 촘촘히 연결하고 상호 보완적인 협력을 유도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유럽 차원의 공모 기반 접근, 투명한 접근 절차, 학문적 우수성을 중심으로 한 평가 기준이 필수적이라는 점도 강조된다.
특히 이 제안은 AI 활용에서 소외되기 쉬운 인문학과 예술 분야의 연구자들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분산형 인프라는 대규모 자본이나 기술력이 부족한 연구자들에게도 접근 기회를 제공할 수 있으며, 다양한 관점에서의 AI 활용을 장려함으로써 학문 전체의 창의성과 포용성을 확장하는 데 기여한다.
EUA는 더불어 이러한 인프라가 환경적으로도 지속 가능해야 한다고 제안하며, 친환경적 데이터센터 설계와 에너지 효율성 제고가 병행되어야 한다는 점을 덧붙이고 있다. 즉, 분산형 인프라는 기술적 효율뿐 아니라 생태적 정의와도 맞닿아 있는 구조로, 유럽이 추구하는 지속가능한 혁신의 기반이라는 것이다.

공공자금 중심의 재정 설계와 공익 연구의 확보
유럽연합은 InvestAI와 같은 정책을 통해 민간 자본의 투입을 적극적으로 유도하고 있다. 하지만 유럽대학협회(EUA)는 이러한 민간 주도적 흐름이 오히려 학문과 공익 중심의 연구 생태계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점에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보고서는 인공지능 인프라와 관련된 연구 활동은 반드시 공공자금을 기반으로 설계되어야 하며, 이는 민간 투자와의 병행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AI 연구의 핵심은 단기적인 시장성과 수익성보다는, 인류 전체의 지식 확장을 추구하는 블루 스카이 리서치(blue-sky research)에 있다. 따라서 보고서는 유럽연합이 기존의 다양한 연구지원 프로그램을 통합하거나 재배분하는 수준을 넘어서, 별도의 신규 재원을 확보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특히 이러한 공공재원은 경쟁력 있는 과학자들에게 투명하고 공정하게 배분되어야 하며, 민간 주도의 상업적 모델에만 집중된 투자를 견제할 수 있는 구조여야 한다.
또한, AI 인프라를 단지 기술 산업의 부속물로만 간주하지 않고, 공공의 이익과 학문적 자유를 위한 공동 자산으로 정의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된다. 이는 장기적으로 유럽 사회 전반이 기술 발전의 혜택을 공평하게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하며, 동시에 소수 기업이나 특정 분야에 의한 기술 독점을 방지하는 사회적 안전망이 될 수 있다.
궁극적으로 EUA는 AI 인프라와 관련된 공공재정은 학문 공동체가 자율성과 창의성을 잃지 않고, 인류 공동의 지식 생태계를 확장하는 데 기여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과학자 주도 거버넌스를 통한 AI 활용 기준 설정
AI 인프라와 기술이 빠르게 확산되는 가운데, 그 활용 기준과 우선순위를 누가 정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전략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유럽대학협회(EUA)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분명한 해답을 제시한다. 바로 학문 공동체가 주도적으로 거버넌스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AI 팩토리를 비롯한 인프라의 접근성과 운영 원칙을 설정할 때, 과학자와 연구자들의 독립적 목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를 위해 ‘과학위원회(Scientific Council)’와 같은 자문기구를 구성하여, 학문적 우수성과 윤리적 책임을 기준으로 인프라 접근권을 배분할 것을 제안한다. 이 기구는 학제 간 형평성과 민간 협력의 타당성까지 종합적으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하며, 특정 분야나 기업의 영향력에 휘둘리지 않는 독립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특히 이 거버넌스 모델은 공학, 컴퓨터과학 등 전통적인 AI 응용 분야뿐 아니라, 인문학과 예술 분야의 연구자들에게도 동등한 접근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각 학문 분야가 AI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전문성과 실천 경험은 오직 해당 분야 연구자들에게서 비롯될 수 있으며, 따라서 이러한 다원적 관점이 정책에 반영되어야 한다는 것이 보고서의 핵심 주장이다.
더불어 EUA는 과학자 중심 거버넌스가 단순한 절차적 장치에 그치지 않고, AI 활용 전반에 걸쳐 신뢰성과 정당성을 확보하는 기제로 작동해야 한다고 보았다. 과학계가 스스로 기준을 설정하고, 자율적으로 점검하며, 필요할 경우 민간이나 정책 당국과 협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질 때, AI 생태계 전반의 건강성과 지속 가능성이 담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유럽 AI법 및 디지털권리선언과의 연계, 윤리적 리스크 대응
AI 기술의 발전은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열어주지만, 동시에 인류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민감한 영역까지 침투하면서 윤리적, 사회적 통제가 필수적인 기술로 떠올랐다. 이에 대해 유럽대학협회(EUA)는 유럽 AI법(AI Act)과 디지털권리선언(Digital Rights and Principles)을 기반으로 하는 가치 중심의 전략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보고서는 단순히 기술을 규제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AI의 활용이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적 신뢰를 해치지 않는 방향으로 설계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AI 팩토리를 포함한 인프라 설계 초기부터 위험도가 높은 프로젝트에 대한 윤리적 감독 체계를 마련해야 하며, 이를 통해 신뢰 기반의 기술 생태계를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 주장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과학자들과 대학은 감시 대상이 아니라, 윤리적 기준을 함께 정의하고 실행하는 공동의 주체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AI의 오작동, 편향, 개인정보 침해 등의 잠재적 리스크를 판단하고 검증할 수 있는 경험과 전문성은 학문 공동체 내부에 존재한다. 특히 인문학, 사회과학 분야의 지식은 기술 중심 접근이 놓치기 쉬운 사회적 맥락을 보완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EUA는 윤리적 규제가 기술 발전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중의 신뢰를 확보하고 고위험 AI 프로젝트의 사회적 정당성을 강화하는 수단임을 분명히 한다. 유럽이 AI 기술의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으면서도, 독자적인 가치 체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윤리 기반 전략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오픈사이언스를 위한 데이터 공유 확대와 저작권 제도 개혁 요구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은 방대한 양의 데이터에 기반하며, 이는 학문적 탐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유럽대학협회(EUA)는 현재의 데이터 접근 구조가 AI 기반 연구를 저해할 수 있는 심각한 제약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오픈액세스(Open Access)로 공개된 논문조차도 텍스트 및 데이터 마이닝(Text and Data Mining, TDM)을 제한하는 출판사의 관행은 AI 학습과 모델 개발에 실질적인 장벽이 되고 있다.
보고서는 유럽연합의 AI 전략이 ‘데이터 유니온 전략(Data Union Strategy)’과 긴밀히 연계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공공 인프라가 공공의 이익을 위해 존재해야 하듯, 공적으로 생산된 데이터 또한 원칙적으로 공공의 자산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기초연구, 학제 간 협업, 시민과학 프로젝트 등은 민간의 폐쇄적 데이터 시장으로부터 독립적인 데이터 접근성을 필요로 하며, 이는 곧 공공 투자의 정당성 문제와도 연결된다.
또한 보고서는 EU 저작권지침(Copyright Directive)의 국가별 상이한 해석이 AI 학습을 위한 데이터 활용에 혼선을 주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에 따라 유럽 차원의 통일된 법적 틀을 마련하고, 과도한 개인정보 보호 규정의 해석으로 인한 위축 효과도 개선되어야 한다고 제언한다. 단지 데이터를 보호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를 안전하고 책임 있게 활용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데이터 주권이라는 것이다.
EUA는 이러한 방향이 단순히 연구자 편의를 위한 주장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AI 시대의 학문 생태계는 ‘공유’를 전제로 한 협업과 재사용이 핵심이며, 데이터에 대한 과도한 통제는 오히려 과학과 기술 발전을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결국 오픈사이언스의 진정한 실현은 데이터의 자유로운 흐름과 공정한 접근을 보장하는 법적·제도적 기반 위에서 가능하다는 것이 보고서의 결론이다.
AI 전략, 기술을 넘어 공동체의 미래를 설계하다
유럽대학협회(EUA)가 제안한 AI 전략의 6대 원칙은 단지 기술 인프라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 원칙들은 과학의 공공성, 연구자의 자율성, 사회적 신뢰, 데이터 공유의 책임성, 그리고 윤리적 기준과 가치 지향성까지 아우르며, 유럽이 기술경쟁의 중심에서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를 되묻는다.
보고서는 명확히 말한다. AI 시대에도 학문은 사적 이익이나 독점 구조가 아니라, 공공의 선을 위한 협력과 탐구의 과정이어야 한다. 따라서 AI에 대한 투자는 단지 하드웨어나 알고리즘을 넘어, 이를 활용할 수 있는 지적 공동체, 다시 말해 대학과 연구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유럽이 글로벌 경쟁 속에서도 고유한 ‘지식주권(Knowledge Sovereignty)’을 확립하는 길이며, 민주주의와 과학의 공존을 지속 가능하게 하는 기반이 된다.
또한 이 전략은 유럽에만 국한된 메시지가 아니다.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의 고등교육 기관과 과학기술정책 입안자들에게도 강력한 시사점을 던진다. 민간 플랫폼의 기술력에만 의존하지 않고, 공공의 원칙과 학문 공동체의 판단이 중심이 되는 기술정책이 절실하다는 점이다. 특히 AI 활용과 관련된 윤리 문제, 데이터 접근성, 학제 간 형평성, 인프라 투자방식 등은 우리 사회 역시 지금 고민해야 할 과제들이다.
결국 AI는 단지 빠르고 효율적인 기술이 아니라, 사회가 기술을 통해 어디로 나아갈 것인지를 묻는 ‘거울’이다. 유럽은 그 거울을 통해 자신들의 가치와 미래를 다시 설계하고자 한다. 이제, 우리는 어떤 답을 준비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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