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무너뜨린 지식의 희소성
지식은 오랫동안 대학의 가장 강력한 자산이자 존재 이유였다. 대학은 정보를 독점하고, 이를 체계화하며, 그것을 습득하는 사람에게 학위와 자격을 부여하는 구조였다. 그러나 이 구조는 이제 균열을 맞고 있다. 인공지능, 특히 생성형 AI의 등장은 지식을 더 이상 희소한 것이 아닌, 손쉽게 접근 가능한 자원으로 바꾸고 있기 때문이다.
ChatGPT를 비롯한 AI 도구들은 몇 초 만에 고전 문헌을 요약하고, 복잡한 코드를 작성하며, 논문의 초안을 생성할 수 있다. 질문만 정확하다면, 어떤 분야의 지식이든 일정 수준 이상의 응답을 얻는 일이 가능해졌다. 지식에 접근하고, 정리하고, 가공하는 일은 더 이상 전문가의 전유물이 아니다. 정보의 장벽은 사라졌고, 지식의 희소성은 붕괴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대학의 경제적·사회적 위치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국과 영국 등 주요 국가에서는 이미 등록금 프리미엄—대학 학위가 부여하는 경제적 가치—이 감소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졸업장이 가져다주던 ‘평균 이상 소득’이라는 보장은 약화되고 있고, 기업들은 단순히 학위를 기준으로 인재를 평가하지 않기 시작했다. 이제는 실제 문제 해결 능력, AI와 협업할 수 있는 역량, 비정형적 판단력 등이 더욱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
더 이상 지식을 파는 곳이 아니다
이처럼 대학이 제공해온 핵심 가치, 즉 ‘지식의 전달’이 기술에 의해 대체되고 있는 상황에서, 대학은 존재의 이유를 다시 질문해야 하는 시점에 왔다. 단순히 새로운 기술을 가르치거나, AI 도구의 사용법을 안내하는 수준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대학은 이제 질문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가르칠 수 있는가?”, “우리가 가르치는 것은 AI가 줄 수 없는 것인가?”
지식은 AI가 줄 수 있다. 하지만 판단, 책임, 감정, 창의성, 비판, 성찰은 여전히 인간의 영역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대학이 지켜야 할 교육의 본질이기도 하다. 즉, 대학은 ‘무엇을 아는가’보다 ‘어떻게 사고하는가’, ‘어떻게 판단하는가’를 가르치는 곳으로 재설계되어야 한다. 그것이 이 시대의 대학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자, 다음 세대를 위한 진정한 준비이기도 하다.
AI가 대체하는 능력, 그리고 남겨진 영역
인공지능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규칙 기반의 작업을 빠르게 대체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보고서 요약, 뉴스 작성, 프로그래밍 코드 생성, 계약서 문안 초안 작성 등은 이미 AI가 사람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게 수행할 수 있는 영역이 되었다. 정보 정리, 반복 작업, 규범적 문서 구성은 일정한 패턴과 형식을 따르기 때문에, 알고리즘이 훈련되기에 적합하다.
이는 단지 사무 보조 업무나 기술직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기존에 대학 졸업생들이 진입하던 화이트칼라 초급 직무 상당수가 AI에 의해 대체되고 있다. 회계, 법률, 마케팅 분석, HR 지원 등은 특히 큰 영향을 받고 있으며, 이로 인해 사회 진입 시점의 ‘출발선’ 자체가 AI와의 경쟁 구도로 바뀌고 있다.
반면, AI가 아직 대체하지 못하거나 대체하기 어려운 영역도 분명히 존재한다. 다음과 같은 역량들은 인간 고유의 것으로 남아 있으며, 앞으로 오히려 더욱 중요해질 가능성이 크다.
-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 주어진 정보의 신뢰도를 평가하고, 다양한 관점을 비교하며,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
- 복원력과 적응력(Resilience & adaptability): 예측 불가능한 환경 속에서 실수와 실패를 통해 다시 시도할 수 있는 역량
- 감정지능(Emotional intelligence): 타인의 감정과 맥락을 읽고, 공감하며, 협업을 조율할 수 있는 능력
- 윤리적 책임(Accountability & ethics): 결과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인식하고, 옳고 그름을 구별할 수 있는 판단력
- 협업과 팀워크(Teamwork & collaboration):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과 갈등을 해결하고 공동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소통 능력
- 창의성과 실행력(Entrepreneurial creativity): 새로운 아이디어를 기획하고, 실행 가능한 방식으로 전환하는 능력
- 성찰과 지속학습(Reflection & lifelong learning): 스스로를 돌아보고, 배움을 중단하지 않으며 지속 가능한 성장을 추구하는 자세
‘C.R.E.A.T.E.R.’ – AI 시대, 대학이 길러야 할 7가지
이러한 역량들을 요약해 하나의 모델로 정리한 것이 바로 ‘C.R.E.A.T.E.R.’ 프레임워크다. 이 프레임은 지식의 전달이 아닌 인간의 사고와 판단, 태도와 윤리를 중심으로 교육 목표를 재구성하고자 하는 시도다.
구성 요소 | 핵심 내용 |
---|---|
C – Critical thinking | 비판적 사고, 논리적 분석, 정보의 질 평가 |
R – Resilience & adaptability | 변화에 대한 유연한 대응력, 실패를 딛는 회복력 |
E – Emotional intelligence | 감정 조율, 공감, 갈등 해소 능력 |
A – Accountability & ethics | 책임감, 윤리적 판단과 행동 기준 |
T – Teamwork & collaboration | 팀 내 역할 수행, 협력적 문제 해결 |
E – Entrepreneurial creativity | 창의적 사고, 혁신 기획 및 실행 역량 |
R – Reflection & lifelong learning | 자기 성찰, 학습 지속력, 성장 마인드셋 |
이 모델은 단지 역량 리스트가 아니라, AI 시대에도 인간이 가치 있게 작동하기 위한 조건들을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대학 교육은 이제 C.R.E.A.T.E.R.에 맞춰 커리큘럼, 수업 방식, 평가 체계를 전면적으로 재설계할 필요가 있다.
시험은 AI가 대신 푸는데, 대학은 무엇을 평가하고 있는가
대학 교육이 변화해야 한다는 요구는 이미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지금의 변화는 이전과 차원이 다르다. 단지 시대에 맞는 교과서를 쓰거나, 온라인 콘텐츠를 확대하라는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대학이 무엇을 평가하고 있는가, 어떻게 학습을 설계하고 있는가를 근본부터 다시 묻는 일이다.
예를 들어, 전통적인 시험은 더 이상 학습의 효과를 측정하는 유효한 도구가 아니다. 객관식 문제, 지식 재현형 서술 과제, 정답이 명확한 리포트는 이미 대부분 AI가 수초 안에 답할 수 있는 수준이다. ChatGPT는 한 학기 분량의 수업 내용을 요약하고, 예상 문제에 대한 모범 답안을 작성하며, 인용과 주석까지 자동으로 구성해낸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생이 이 문제를 풀 수 있는가?”는 더 이상 유의미한 질문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학생이 왜 이렇게 판단했는가?”, “이 답변이 어떤 윤리적 기준을 바탕으로 했는가?”와 같은 질문으로 이동해야 한다.
즉, 대학은 더 이상 지식을 ‘암기하고 회상하는 능력’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 대신, 정보를 평가하고 판단하며, 새로운 맥락에 적용하고,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사고 능력을 길러야 한다. 시험이란 이름 아래 AI가 대신 풀 수 있는 문제를 내고, 그것에 점수를 매기는 교육은 AI 시대에는 오히려 학생에게 불신과 회피만을 학습시킬 뿐이다.

수업을 다시 설계하라 – ‘현실을 푸는 교실’로
이런 변화는 수업의 내용뿐 아니라, 수업의 ‘형식’ 자체를 바꿀 것을 요구한다. 전통적인 강의실 구조, 교수의 일방적 설명, 정답이 있는 과제는 이제 더 이상 효과적인 학습 환경이 아니다. 대신, 현실 기반 프로젝트, 윤리적 딜레마를 중심으로 한 토론, 협업 중심의 문제 해결 수업이 점점 더 중요한 모델로 부상하고 있다.
예컨대, 의사결정 시뮬레이션은 기술과 윤리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학생들의 판단을 요구한다. ‘AI가 채용을 평가할 때 나타나는 편향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기술이 만들어낸 정보와 실제 피해 사이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와 같은 과제를 중심으로 수업을 구성하면, 학생들은 단지 지식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복합적인 상황을 해석하고, 선택을 설명할 수 있는 사고력을 갖추게 된다.
또한, 수업은 더 이상 ‘혼자 공부하는 공간’이 아니라 협업과 상호작용의 실험실이 되어야 한다. 팀 기반의 문제 해결, 산업계와 연계된 실무형 프로젝트, 지역사회 참여 과제 등을 통해 학생들은 이론을 넘어 현실에 접속하는 학습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경험은 AI가 제공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학습 경로이며, 바로 그것이 대학이 제공할 수 있는 진짜 가치다.
대학은 더 이상 ‘지식 인증기관’일 수 없다
전통적으로 대학은 학위를 수여함으로써 ‘이 사람이 이만큼의 지식을 갖추었다’는 인증 기관의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 모델이 작동하지 않는다. 학위라는 문서가 지식을 담보하던 시대는 끝났고, 지금 기업과 사회가 요구하는 것은 즉시 활용 가능한 역량과 실무 경험, 그리고 비정형적 문제에 대응할 수 있는 사고 구조다.
대학이 학위라는 단일 인증만을 고집할 경우, 그 가치는 더 빠르게 희석될 수 있다. 따라서 지금 대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학습 경험의 설계자이자 인증자’로의 전환이다. 교육과정을 어떻게 구성하고, 어떤 경험을 제공하며, 학습자가 어떤 과정을 거쳐 성장했는지를 세분화된 방식으로 추적하고 인증할 수 있어야 한다.
그 해법 중 하나로 microcredentials이 주목받고 있다. 이는 특정 기술이나 역량을 중심으로 구성된 소규모 학습 단위로, 짧은 기간에 집중 학습하고 결과를 포트폴리오나 실습으로 인증받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협업과 갈등해결’, ‘윤리적 딜레마 분석’, ‘AI 보완 업무 설계’ 같은 주제를 수료하고, 실제 적용 사례를 제출하면 인증이 이루어지는 식이다.
이러한 방식은 학생 개인이 자신의 역량을 더 정교하게 설계하고 증명할 수 있는 도구가 되며, 기업 역시 단일 학위보다 더 구체적인 기준으로 인재를 판단할 수 있게 만든다. 동시에 대학은 커리큘럼 유연성을 확보하고, AI 시대에도 살아 있는 교육 기관으로 재정의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하게 된다.
학습을 증명하는 새로운 방법들
이런 변화는 단지 새로운 인증 제도를 도입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학습 자체를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에 대한 철학의 변화가 함께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평가는 대부분 ‘최종 성과’ 중심이었다. 그러나 AI 시대에는 결과보다 과정과 판단의 이유, 즉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드러내는 구조가 중요해진다.
이를 위해 대학은 메타인지 기반 평가, 성찰 포트폴리오, 실시간 피드백 루프, 동료 평가 시스템 등을 도입해야 한다. 학생이 스스로 자신의 사고 과정을 설명하고, 그것이 어떤 결과로 이어졌는지를 기록하는 구조는 AI가 대신할 수 없는 학습 증거가 된다. 예컨대 같은 리포트를 작성해도, 그에 이르는 사고 경로, 사용한 자료의 신뢰도 분석, AI의 사용 유무와 편집 내역을 함께 제출하게 한다면, 이는 단순한 정답보다 더 깊이 있는 학습을 반영할 수 있다. 이러한 학습 증명의 변화는 단지 평가 방식의 개혁이 아니다. 대학이 교육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의 전환이며, 학습자의 역량을 더 정교하게 이해하고 지원하려는 시도다.
기술의 학교가 아니라, 판단의 학교여야 한다
AI가 넘쳐나는 시대에 대학은 지식을 제공하는 공간이 아니라, 지식 사이에서 옳은 것을 가려내고, 복잡한 갈등 속에서 방향을 선택하는 법을 배우는 공간이어야 한다. 기술을 따라잡는 데 급급한 교육은 결국 기술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만다. 반면, 인간 고유의 사고력, 판단력, 윤리성, 협업 능력은 기술로는 대체할 수 없는 영역이며, 바로 그곳이 대학이 진입해야 할 새로운 교육 지형이다.
지금의 대학은 기술을 가르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기술이 만든 새로운 조건 속에서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함께 사유하는 공간, 그것이 대학이 되어야 할 자리다. 그 안에서 학생은 단지 정보를 습득하는 존재가 아니라, 선택하고 판단하고 책임지는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어야 한다.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가르쳐야 할 시간
지금은 대학이 자신에게 던져야 할 근본적인 질문과 마주할 때다. “우리는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그것은 AI가 줄 수 없는가?”, “우리는 어떤 인간을 길러내고 싶은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대학은 시대의 흐름에 점점 밀려날 수밖에 없다. 지식은 더 이상 희귀하지 않다. 하지만 지혜는 여전히 얻기 어렵다. 그리고 지혜는 혼자서 자동으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경험과 질문 사이에서 길어올려지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교육의 본질이며, 앞으로 대학이 붙잡아야 할 진짜 가치다.
대학이 지혜의 공간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가르침의 방식도, 평가의 구조도, 교육의 목표도 모두 다시 설계되어야 한다. 그 변화는 거창할 필요는 없지만, 결코 피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변화는 지식의 가격이 0에 가까워질수록, 인간의 판단력은 더욱 값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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