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조 원 기부 약속한 빌 게이츠, 하지만 전 세계 공적 보건 지원은 후퇴 중… WHO는 경고한다: “전진이 아니라 후퇴가 시작됐다”
기부를 넘어선 결단: 빌 게이츠, 20년 내 ‘전 재산 사회 환원’ 선언
2025년 5월, 빌 게이츠는 자신의 전 재산을 앞으로 20년 내 사실상 전부 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이미 2000년 전 부인 멜린다 프렌치 게이츠와 함께 설립한 빌 앤 멜린다 게이츠 재단을 통해 전 세계 보건 및 빈곤퇴치 사업에 수십 년간 기여해왔으며, 이번 결정을 통해 기부의 종착점이 아니라 정점을 선언한 셈이다.
그는 성명에서 “지금은 자원을 보유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전 세계가 직면한 긴급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쓰여야 할 때”라며, 원래 사망 이후로 예정했던 자산의 분산을 생애 중으로 앞당기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게이츠 재단은 2045년까지 2,000억 달러(약 270조 원)를 사용하게 되며, 이는 기존 운영 수준의 2배 이상 규모이다.
게이츠 재단은 ▲산모 및 유아 사망 예방, ▲치명적 감염병 퇴치, ▲극빈층 탈출이라는 세 가지 핵심 분야에 집중한다고 발표했다. 특히 기후변화, 질병, 인구 이동이라는 복합 위기 속에서 공공 보건 인프라의 재설계를 시도하려는 의지가 돋보인다.
기부는 늘지만 지원은 줄고 있다: 퇴보하는 국제 보건 격차 해소
하지만 이처럼 거대한 민간 기부가 주목받는 배경에는 국가 단위의 보건지원 후퇴라는 현실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미국과 유럽 주요 국가들의 글로벌 보건예산 삭감은 개발도상국에 치명적 타격을 주고 있다.
미국은 트럼프 행정부 이후 글로벌 보건 분야에 대한 지원을 지속적으로 축소해왔다. 2024년 기준 120억 달러(약 16조 원)에 달하던 미국의 국제 보건 기여금이 사라질 경우, 향후 15년간 2,500만 명이 조기 사망할 수 있다는 분석도 존재한다.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에이즈 대응기구 UNAIDS는 미국과 유럽 국가들의 기부 중단으로 인해 직원 절반을 감축하고, 일부 사무소는 폐쇄하거나 저비용 지역으로 이전할 수밖에 없다고 발표했다. 영국, 스웨덴,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등도 지난 해부터 유사한 지원 삭감을 단행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빌 게이츠 개인의 기부조차 국가 단위의 공백을 메우기엔 역부족이라는 세계 보건 위기의 단면을 드러낸다.
WHO의 경고: “보건격차 해소 진전은 멈췄고, 일부는 후퇴 중이다”
2025년 세계보건기구(WHO)는 2008년 이후 처음으로 세계 보건 불평등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진전은 있으나 그 속도는 멈췄고, 일부 영역에서는 되레 후퇴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평균 수명은 여전히 국가 간 12.5년 차이가 나며, WHO의 목표인 8.2년까지 줄이기엔 역부족이다. 예를 들어 일본인은 평균 84.5세를 기대할 수 있는 반면, 레소토는 51.5세에 불과하다. 5세 미만 유아 사망률은 2000년 1,000명당 77명에서 2023년 37명으로 낮아졌지만, WHO가 설정한 목표는 2040년까지 1,000명당 8명에 도달하는 것이다. 산모 사망률은 2000년 이후 40% 줄었지만, 여전히 출산 10만 건당 197명이 사망하고 있다. WHO는 이를 16명으로 줄이길 원한다. 또한 국가 내 격차 역시 심각하다. 서유럽의 빈곤층이 미국의 부유층보다 더 오래 사는 현상은, 공공의료 시스템과 사회안전망의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WHO는 인종차별, 젠더 불평등, 고립, 공공서비스 약화, 기후 변화, 디지털 격차 등 ‘사회적 결정요인’이 건강을 좌우하는 핵심 변수라고 지적했다.
기후 위기와 건강 격차의 새로운 고리
WHO는 최근 보고서에서 기후 변화가 세계 보건 격차에 미치는 영향을 특히 강조했다. 향후 5년 내 기후 변화로 인해 최대 1억 3,500만 명이 극빈 상태에 빠질 수 있으며, 이로 인한 보건 위기는 단순한 의학적 대응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기후 변화는 질병의 지리적 확산, 식량 안보 위협, 물 부족, 대기오염, 열파 증가 등 보건 시스템 전반에 걸쳐 복합적 위기를 유발한다. 특히 열대 및 아열대 지역에서는 말라리아, 뎅기열 같은 전염병의 확산이 가속화되며, 이 지역 주민들은 예방접종률도 낮고 공공보건 접근성도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보고서는 “기후와 건강은 더 이상 별개의 문제가 아니며, 보건 예산과 환경 투자는 한 묶음으로 고려돼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민간의지는 강력하지만, 구조를 바꿀 수는 없다
빌 게이츠의 기부는 단연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그 상징성은 분명하다. 개인의 부를 공공 선에 전폭적으로 헌신한다는 선언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드문 결단이다. 그는 이미 수십 년간 말라리아, 폴리오, 코로나19, 소아마비 등 보건 현장에서 핵심적 자금원 역할을 해왔고, 2045년까지 사용될 2,000억 달러 규모의 지원은 여전히 유례없는 민간 보건 기여다. 하지만 WHO와 글로벌 NGO들은 “민간 기부는 국가 시스템의 공백을 대체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공공의료 인프라, 국경 간 질병 대응, 예방접종 공급망, 의료 교육, 긴급 대응 체계 등은 반드시 국제 공조와 공공재정으로만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게이츠 스스로도 “우리는 국가와 국제기구의 헌신 없이는 아무리 많은 돈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강조했다.
2025년 세계 보건의 키워드는 “민간의 결단과 공공의 책임”이다. 빌 게이츠가 보여준 기부는 전 세계 부유층, 기업, 재단들에게 ‘자발적 기여’의 문화적 기준을 제시했다. 하지만 그것이 영속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은 WHO 보고서가 잘 보여준다.
국가 간, 국가 내 건강 격차는 보건 시스템만의 문제가 아니다. 불평등한 경제 구조, 공공서비스의 질, 정치적 안정성, 젠더와 인종의 차별, 교육 수준, 기후 위기까지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결국 글로벌 보건은 질병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정의의 문제다.
WHO는 각국 정부에 대해 보건 예산의 안정적 확대, 공공보건 접근성 강화, 디지털 헬스 격차 해소, 젠더·인종 불평등 해소, 기후-보건 연계 정책 수립, 팬데믹 대응 공조 메커니즘 재정비를 촉구하고 있다.

기부는 시작일 뿐, 연대 없이는 멈춘다
빌 게이츠는 거대한 결단을 내렸다. 하지만 그의 기부는 ‘세계 보건의 미래를 민간이 책임진다’는 선언이 아니다. 오히려, 국가들이 공공의 책임을 회피하는 현실에 대한 반어적 고발일지도 모른다. 세계 보건은 지금 진전과 퇴보의 갈림길에 있다. 가장 가난한 지역의 아이들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더 많이 아프고 더 빨리 죽는 현실은, 단지 돈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 사회가 무엇을 우선순위로 두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우리가 진정한 의미의 건강한 세상을 원한다면, 누군가의 거대한 기부만이 아니라, 함께 움직이는 정치적·사회적 의지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지금 당장 시작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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