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행정부의 압박은 단지 정치적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국제화 시대 대학의 생존 조건을 재정의하는 구조적 경고다.
대학 자율성의 신화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대학의 자율성’은 오랫동안 학문 자유의 핵심 가치로 여겨져 왔다. 대학은 정치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하고, 연구와 교육은 외부 간섭 없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믿음은 근대 이후 고등교육 담론의 주춧돌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글로벌 고등교육 체제 속에서 이 자율성은 더 이상 자명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 자본, 법률, 기술 등 다양한 외부 시스템과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속에서 ‘조건부로’ 유지되는 취약한 균형일 뿐이다.
하버드대학교를 둘러싼 최근의 사태는 이 균형이 얼마나 쉽게 깨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트럼프 행정부는 반유대주의 대응을 명분으로 하버드의 국제학생 수용 권한을 박탈하고, 30억 달러 규모의 연방 보조금 회수를 경고했으며, 다수의 연구 계약을 ‘편의상 해지’했다. 이 모든 과정은 구체적 조사나 정식 청문 없이 진행됐다.
많은 이들이 이번 사태를 ‘학문 자유에 대한 정치적 위협’으로 간주한다. 물론 이 해석은 정당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 사건은 동시에 대학 자율성의 구조적 기반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폭로한 계기이기도 하다. 대학은 교육·정치·법률·경제 시스템에 걸쳐 있는 복합적 조직이다. 따라서 자율성이라는 것은 실질적으로는 수많은 외부 조건과의 ‘협의된 정렬’ 위에 존재한다.
사회시스템이론에 따르면, 현대 사회는 정치, 경제, 법, 교육 등 각기 다른 작동 논리를 가진 시스템들로 분화되어 있다. 이들 시스템은 ‘구조적 커플링(structural coupling)’을 통해 상호 연결되지만, 이 연결은 조화가 아니라 ‘상호 자극(mutual irritation)’이다. 대학은 이런 커플링의 중심에 있다. 즉, 대학은 정치의 지원을 받아야 하고, 경제와 법률의 규제를 따라야 하며, 동시에 학문이라는 자체 논리를 유지해야 하는 복합적 존재다.
국제화 모델의 한계와 붕괴 조짐
국제화는 오랫동안 대학의 자율성과 성장을 지지하는 주요 수단이었다. 유학생 유치, 국제 연구 네트워크, 글로벌 랭킹은 대학의 위상을 높였고, 재정적 지속 가능성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이 모델은 이중적인 기반 위에 세워져 있었다. 외부의 정치적 의지, 법률적 인프라, 비자정책, 대중적 담론 등이 허물어질 때, 국제화는 힘을 잃는다.
트럼프의 조치가 보여준 것은 바로 이것이다. 국제화는 내부적으로는 의사결정 사항일 수 있지만, 그 실현 가능성은 외부 시스템의 허락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 허락은 언제든 철회될 수 있다. 다시 말해, 국제화는 자율적 선택이 아니라 구조적 종속의 일부였던 셈이다.
대학이 이 위기에서 배워야 할 가장 큰 교훈은, 이제 자율성을 전제로 한 ‘주권 담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더 이상 완전한 독립이 아니라, 복잡한 상호의존성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관계 관리 능력’이다.
국제화는 더 이상 다문화 학생을 받는다는 의미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지식의 다양성(cognitive justice), 제도 간 긴장 관리, 정치·법률 리스크 대응, 이념적 포용성 확보를 포함한 전방위적 능력을 요구한다. 학문 공동체는 이제 ‘고립된 자유’를 주장하기보다, ‘조건부 자유’를 어떻게 안정화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새로운 국제화를 위한 문법: 공존, 협상, 유연성
‘글로벌 대학’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형태는 근본적으로 재정의되어야 한다. 하버드 사태는 단지 하나의 사례가 아니라, 오래된 국제화 서사의 한계가 명확히 드러난 전환점이다.
앞으로의 국제화는 더 이상 ‘명성’이나 ‘경제성’이 아니라, ‘합법성’과 ‘정당성’의 관점에서 정립되어야 한다. 즉, 정치적 기류에 무조건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전략적으로 협상하고, 제도적으로 조율하며, 문화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대학만이 지속 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낭만적 자율성의 종말이 아니라, 성숙한 자율성의 시작이 될 수 있다. 국제화의 위기 앞에서 우리가 진정 다시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대학은 어떤 조건 아래에서, 누구와 함께, 무엇을 위해 글로벌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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