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 중심 병목사회’를 깨뜨릴 수 있을까
학벌은 단순히 교육 이수 경로가 아니라, 계층을 나누고 기회를 분배하는 기준이 되어 왔다. 학벌은 실력의 대리 지표로, 사회적 신뢰를 가늠하는 일종의 ‘인증 시스템’이 되었으며, 이는 결국 병목 사회의 기반이 되었다. 한국 사회의 고질적 불신 구조—정치 불신, 기업 불신, 언론 불신—속에서 오직 학벌만이 믿을 수 있는 기준처럼 기능해 온 것이다.
김종영 교수는 이 지점을 가장 핵심적인 목표로 본다. 그는 서울대 10개 정책을 통해 “한국 사회의 신뢰 자산을 확장하자”고 주장한다. “사회적 신뢰가 하나의 통로에 몰리면, 경쟁은 격화되고 사기는 저하된다. 경쟁이 아니라 기회의 다양성이 신뢰를 가능하게 해야 한다.”
다시 말해 서울대 10개 정책은 단순히 교육 기회의 확장이 아니라, 사회적 권위와 신뢰를 탈중심화하려는 구조개혁이다. 입시 구조, 채용 구조, 사회문화적 상징체계를 동시에 건드리는 다층적 개혁이다.
우선 제도 측면에서는, 채용과 승진, 자격시험, 공공기관 선발 등에서 ‘학벌 블라인드’ 제도가 실질적으로 작동해야 한다. 대기업과 공공기관의 채용에서 대학명을 제외하거나, 서열화된 대학 평판보다 실제 직무역량을 중심으로 평가하는 시스템이 자리 잡아야 한다.
문화적으로는, 학벌 자체가 개인의 능력을 보장하는 지표가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선 미디어, 교육과정, 부모 세대의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 현재 한국 사회는 여전히 ‘스카이캐슬식 교육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녀의 대학은 곧 부모의 사회적 신분이라는 인식이 만연한 상황에서, 학벌 해체는 구조적으로 어렵다.

하지만 최근 변화의 조짐도 있다. 삼성, LG, CJ 등 주요 대기업은 AI 면접이나 블라인드 전형을 확대하고 있고, 공공기관도 출신대학 표시를 금지하는 제도를 강화하고 있다. 서울대 10개 정책이 이 흐름과 맞물릴 경우, 다양한 출신 대학의 신뢰도 자체가 높아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서울대-부산대-전북대-강원대’ 동등한 학점교류 및 공동학위제를 도입하면, 기업 입장에서는 ‘서울대 출신’이라는 구별이 무의미해질 수 있다. 실제로 UC 버클리와 UCLA, UCSD가 동일한 캘리포니아 시스템 내에서 학문적 신뢰도를 유지하는 방식은 한국형 네트워크 대학 모델이 가능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 지점은 서울대라는 기관의 역사성, 브랜드, 인프라, 인적 네트워크, 자산 규모 등 복합적인 요인이 결합된 결과다. 단기간에 이런 구조를 해체하거나 분산시키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동시에, 서울대의 상징성과 신뢰도가 ‘자연 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정책적 선택과 지원의 결과’였다는 점도 중요하다. 서울대는 1946년 국립 종합대학으로 출범하면서 국가가 가장 많은 예산을 투입했고, 이후 70년 넘게 한국 사회의 엘리트 교육기관으로 기능해왔다.
서울대 10개 만들기는 이런 권력의 구조가 ‘불가역적’이 아니라 ‘재편 가능한’ 것임을 보여주려는 정책적 시도이기도 하다. 하지만 학벌이 해체된다고 해서 곧바로 평등사회로 전환되는 것은 아니다. 학벌 대신 외국어 능력, 인턴 경력, 해외 경험, 부모 배경 등 다른 ‘새로운 스펙’이 다시 기회를 독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육사회학자들은 이를 ‘스펙의 전이(transference)’라고 부른다.
따라서 학벌 구조를 해체하면서도 새로운 위계 구조가 재형성되지 않도록 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고등교육의 공공성 강화, 청년 일자리의 질 향상, 주거와 의료 등 사회 안전망의 보편화가 병행되어야 한다.
서울대 10개 정책이 진정으로 효과를 가지려면, 이 같은 상징자본의 비대칭을 완화하는 미디어 정책도 필요하다. 정부 차원의 미디어 균형지원, 지역인재 중심 콘텐츠 투자, 비수도권 전문가 풀 확대 등의 노력이 요구된다.
또한 고등교육 자체가 다큐멘터리, 드라마, 예능 등에서 다양하게 조명될 필요가 있다. 독일의 ‘오픈 캠퍼스 미디어 프로젝트’, 일본의 ‘지방국립대 다큐 시리즈’처럼, 대중문화가 고등교육의 공공성과 지역성을 드러내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서울대 10개 만들기 정책은 바로 그 상상을 바꾸려는 시도다. 서울 밖에도 서울대가 있다, 라는 메시지는 단순한 교육 정책이 아니라 사회 질서의 전환이다. 신뢰를 독점하던 상징이 해체되고, 새로운 신뢰의 생태계가 만들어지는 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더 평등하고 유연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서울대 10개’를 넘어서, ‘신뢰의 10개 중심’을 만드는 일이다. 사회적 신뢰의 지리학을 서울 중심에서 전국 중심으로 옮기는 작업은, 단순히 대학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바꾸는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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